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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총정리

쌍둥할매 2024. 1. 1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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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 시간에는 우리나라의 전쟁사에서 제일 평판이 높은 3대첩 중 한가지인 귀주대첩의 주인공 강감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근데 흥미진진한 점은 아무래도 그가 큰 업적을 이룬 전쟁 영웅이다보니 듬직하고 카리스마 있는 특징적인 장군의 이미지가 쎄지만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실제 그의 생김새는 체구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애초에 무신이 아닌 문신이었고요. 다만 엄숙한 자세로 나라의 정책을 결심지으며 나라의 홀연한 기둥 역할을 하였다고 하니, 즉 작지만 큰 인물이었던 셈이죠. 그럼 지금 당장 강감찬의 일대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강감찬 장군 출생

강감찬 장군의 처음 이름은 강은천으로 948년에 태어났는데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해요. 차후 983년 12월이 되자 36세의 나이로 예전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있는데 꽤나 늦은 나이에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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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향후에 그의 행적은 몇번 승급하여 관직 생활 26년 만인 1009년에 정 사품인 예부시랑이 되었다는 기록밖에는 나와 있지가 않아요. 그러한데 그가 관직 생활을 하던 중 고려에서 요 나라의 1차 침입과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게 돼요. 아직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그는 고려 조정 내에서 귀중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얼마 안 가 그가 고려 조정 내에서 급히 판연히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요 나라의 이 차 침공이었어요.

2. 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장군

고려가 북방 방어선을 강화하는 동안 거란의 성장도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서기 1004년 송나라로 밀고 내려간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송나라를 유린하고 그에 대한 우위를 재확인합니다. 하지만 정도로 만족할 거란이 아니었죠. 그리고 본격적인 송나라 정벌을 위해서는 고려를 확실히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마의 삼각 구조가 지닌 위험이 다시 현실화한 것입니다. 1018년 12월 거란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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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직속의 최정예군인 어장 친군을 동원한 총력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전쟁과 600년 후에 벌어지는 병자호란에서 침략군이 채택한 전략이 기본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입니다. 압록강을 건넌 것도 12월로 동일했고 중간에 성들을 공략하지 않고 수도로 직행한 것도 같았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이 전략으로 5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한 달 반 만에 인조로부터 최종적인 항복을 받았습니다.

일단 만주에 있는 유목민족들이 대체로 병농일적 유목 제도를 하다 보니까, 유목민들의 장점이 이런 민간 조직이 바로 군대로 전환된다는 거예요. 그건 되게 장점인데 동시에 농사철이 내년 뭐라 할까요? 유목철이 되면 다 같이 돌아가야 돼요. 그러니까 전쟁 기한이 항상 비슷하게 정해집니다. 실제로 당나라 군대처럼 비병과 보병이 섞여 있는 군대는 보급 기지를 체계적으로 유지하지 않고는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성이 있거나 도시가 있으면 하나하나 함락시키고 가야 돼요. 그러다 보니 진군 속도가 자꾸 처지는 거죠. 그런데 거란같이 유목민족들은 현지 조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거점을 무시하고 들어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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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거란군이 말하는 직공 작전인데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보급 거점을 무시하고 지나치면서 전략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거란군의 최고의 장점입니다.

3. 강감찬 귀주대첩

하지만 이번 전쟁의 결과는 병자호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병자호란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26년 전에 1차 침입과도 완전히 달랐죠 1차 침입 때는 방어군이 출동하는 데만 두 달이 걸렸지만 이번엔 침공 당일 이미 고려군의 요격이 시작되었습니다. 12월 10일 흥화진 남쪽 삼교천에서 벌어진 첫 전투는 고려군의 대승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남하하는 거란군은 고려군의 요격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전투였던 내구산 전투나 세 번째 전투였던 마탄 전투에서도 거란군은 고려군의 요격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확실히 1018년에 고려는 예전의 고려가 아니었습니다.

 

세 차례 패전으로 거란군은 곤경에 빠졌습니다. 전격적으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여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전략이 어긋난 것이죠. 중간에 보급 기지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란군은 고려 영토 안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의 주력 부대가 거란군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거란군을 향해 진격하고 있던 고려 진영은 급보가 날아듭니다. 거란군과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강감찬으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배압은 개경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중간 성을 거치지 않고 직공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온 겁니다. 아마 그거에 맞춰서 군대도 어떻게 재편을 했겠죠. 그래서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강감찬한테 당하고 연속적인 패배를 당했어요. 고령원 입장에서는 이 정도가 되면 수습을 하고 멈춰야 되는데 소배압은 정도 이상의 속전속결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개경을 향해서 남하해 버리는 겁니다. 결국 고려군이 이건 좀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이 정도면 서야 되는데 왜 안 서지 거란군 입장에서는 개경까지 그냥 집권한다. 나중에 이 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어떤 전격전 비슷하게 밀고 내려오는 그런 전술을 시행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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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은 놀라운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1019년 1월 3일 개경에서 불과 40킬로 떨어진 신기해 거란군이 나타났습니다. 개경에서 겨우 하루거리였죠 거랑군이 가까이 온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북방으로 전 병력이 파견된 탓에 수도인 개경에는 병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경은 공포에 빠졌습니다. 이런 경우 왕조국가에서 다음 선택은 왕의 도주였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병자호란 때도 그랬고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공민왕의 경우 왜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개경을 비우고 도주했습니다. 사실 이건 왕조 국가에서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왕이 곧 국가이니까요? 하지만 현종은 도주하지 않았습니다. 적의 주력군이 개경으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군에 맞서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왕이나 백성들이 피난하는 것이 정상인데 여기서 현적이 아주 중요한 결단을 내리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개경에 병력이 별로 없었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민중을 소개시켜서 개경에 주민들을 모으고 저항하겠다라는 결심을 굳혔다는 것은 국왕으로서 굉장한 용기였고 또 한편으로는 소비압이 무리한 징군을 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무모한 진격이기 때문에 저들도 많이 약화됐을 거다 어떤 그러한 판단에 의거해서 우리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겠다라는 모험적인 결단을 한 겁니다.

소배압과 거란군은 난감해졌습니다. 전쟁에서의 승패는 지휘관이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도 인간이 하는 일인지라 결국 의지의 싸움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나온 말이죠. 이 의지의 싸움에서 현종이 소배압을 이겼습니다. 소배압은 결국 후퇴를 결정합니다. 12월 10일 압록강을 건넌 이후 한 달 이상 아무런 보급도 없이 고려의 영토를 전전한 거란군의 후퇴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고려가 이들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죠.

 

 

 

후퇴를 거듭하던 거란군은 2월 2일 귀주성 앞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대륙을 호령하던 거란군이었던 만큼 더 이상 결전을 회피하고 치욕을 당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 전투가 거란과 고려 사이에 30년 전쟁을 끝낸 마지막 전투 강감찬 귀주대첩이었습니다. 거란군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서역에서부터 만주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당할 군대는 없었습니다.

고려군은 그런 군대를 맞아 정면 대결을 벌여 승리한 것입니다. 공성전이 아닌 벌판에서의 회전으로 전성기에 있는 제국의 군대를 괴멸시킨 것은 우리 역사상 이 전투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를 끝으로 거란과의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개월 후인 1019년 5월 힘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란은 평화 협정을 위한 사신을 파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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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적국이자 불과 석 달 전에 고려에 의해 주력군이 몰살당한 나라 거란 여러분이라면 이들의 평화 제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70년 전에 태조 왕건은 별다른 원한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도 거란의 사신을 유배 보내기도 했죠. 하지만 현종의 선택은 할아버지인 왕건과는 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거란을 하나의 어떤 외형적으로는 천자국으로 인정을 하고 소위 고려는 하나의 제국으로서 어떤 책봉 조건 관계를 맺는 선으로 해서 이 전쟁이 많이 마무리됩니다. 그걸 절대 우리가 거란을 여전히 천자국으로 고려가 제후국으로 갔다 해서 이것이 우리가 패배한 전쟁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가 서로 상생을 한 것이죠.

 

그 한편으로 중국에 대한 문화적인 4대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군사적으로 강성한 국가와의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일정하게 수용해서 그 둘을 분리해서 경쟁하게 된 거죠. 이후 고려는 백 여 년간의 평화를 누립니다. 더구나 이 평화는 굴욕적인 종속 관계 속에 얻어진 평화도 아니었습니다. 고려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평화였기에 거란도 송도 고려에 대해 별다른 간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는 한반도 국가로서는 예외적일 정도의 외교적 자율성을 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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