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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채문 장군 고려거란 전쟁 중랑장의 활약은

쌍둥할매 2024. 1. 2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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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외세의 침입이 찾았던 고려 시대에는 여러 영웅 명장 충신들의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고려 초기 고려 최초의 침입이었던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특히 이 차 때 절체의 절명의 위기 그만큼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잘 다리에서 목숨을 걸고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양규가 있겠죠. 하지만 양규 외에도 2차 거란 침입 당시 공을 세웠던 이들이 있습니다. 가운데 이번 영상에서는 어쩌면 생소하실 지채문 장군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지채문 장군 활약

우리는 고려 최고의 명군으로 고려 8대 왕 현종을 꼽는데 만약 지채문 장군이 없었으면 현종은 일찌감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1010년 11월 거란족 요나라의 황제 요 성종이 직접 친정에 나서 무려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제 2차 고려 걸원전쟁이었죠. 실제 40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제의 친정이었으니 병력 수가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거란군은 양규가 있던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통주에서 광주의 30만 대군을 물리쳤지만 정전 통주 성도 함락하지 못해 고려와의 국경지대 강동 6주 중 곽주만을 함락한 채 나머지 다 패싱하고 남하합니다. 그리고 고려 제 이의 수도였던 서경도 함락하지 못하고 무작정 수도 개경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수도지 직공은 전형적으로 거란군이 발해를 멸망시킬 때 썼던 전술이어서 그때를 맹신하고 똑같은 전술을 사용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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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정은 다수가 항복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습니다. 다만 강감찬 등의 일부 주전파는 상황에 마냥 불 유리하지 않으며 현종이 잠깐 남쪽으로 피난을 가서 시간만 팔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죠. 현종은 강감찬 등 주전파의 의견에 따라 수도 개경을 나와 지금의 전남 나주까지 피는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나주까지 피난을 간 건 사이 어느 한 군데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아닌 게 아니라, 현종이 나주까지 가는 피난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했습니다.

2. 고려 거란 전쟁 지채문 : 현종을 지키다

타령하는 병사는 물론이거니와 현종을 호종하던 신하들도 도망가기 일쑤였죠 세기도 힘들 만큼 곳곳에서 산적과 도적대를 만났습니다. 왕의 피는 길에 산적과 도적대가 들이치는 건 이해하기 힘들죠. 고려는 여전히 지방 분권적인 사회였습니다. 중앙 정부의 집권화가 완벽하지 않았던 체제에 국왕은 궁궐에 있을 때나 절대적 존재이지 다급하게 궁궐에 나온 국왕이 다른 지역에서도 환영받으리 장담할 수 없었죠.

 

경기도 양주에서는 아전 정도가 행정 현종에게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라며 모욕을 보이고 또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죠 현종은 요나라 군대에게서 도망치는 동시에 국내 지방의 호족과 유지에게서도 도망쳐야 하는 눈물겨운 피난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적이라고 기록된 자의 공격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공주에 이르렀을 때 공주의 호족이었던 김은부가 극진하게 현종을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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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께서 산과 불을 지나고 서리와 눈을 무릅쓰시며 이렇게 지극한 상황에 이르실 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라며 현종은 물론 호종하던 신하에게도 잘곡과 음식을 대접했죠. 이때의 감사함의 현종은 훗날 전쟁이 끝나고 김은부의 세 딸과 모두 혼인하여 김은부를 왕의 장인어른으로 삼았습니다. 세 딸이 원성왕후 김씨 원혜왕후 김씨 원 은평왕후 김씨로 마던이 원송황후 김씨 사이에서는 9대 왕 덕종 10대 왕 정종을 나왔고 원예왕후 김씨 사이에서는 11대 왕 문종을 나왔으니 김은부는 무려 새해 궁왕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누렸죠 그러나 공주 현종이 전주에 이르렀을 땐 전기 호주 건조기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라면 아예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현종은 겨우겨우 나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현종의 피난길에서 모두가 현종 곁에 떠날 때 끝까지 옆에 있어준 신하가 바로 지채문 장군이었습니다.

3. 고려거란 지채문 서경으로 가다

지채문 장군은 현종을 습격 괴한으로부터 목숨 걸고 현종을 지켜주었으며 싫은 소리 없이 현종의 손과 발이 되어 개경에서 나주까지 언제나 현종을 호종하였죠 지채문 장군은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강조의 정변으로 현종이 직위했을 때 지채문 장군은 무관직 중 하나인 중랑장이 임명되었습니다. 이 차 고려 거란 전쟁이 터지고 거란군이 서경에 이르렀을 때 지채문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서경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맡습니다.

 

지채문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왔을 땐 이미 서경 내에서 거란군에게 항복할 수순을 밟고 있었습니다. 지채문 장군은 거란의 황제 요 성종에게 항복하려던 표문을 중간에 가로친 뒤 불태워 없애버렸고 군사를 서경에 남쪽 문에 주둔시켜 전투 준비에 돌입합니다. 때마침 동북면에서 탁사정이 이끄는 군대가 서경으로 구하로 도착했습니다. 탁사정과 지체만의 지휘하에 고령군을 공격해 오는 거란군을 물리치며 싸움에 연전연승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채문 장군은 거란군의 반격에 패퇴해버렸고 거란군은 그대로 서경을 포위해버렸습니다.

 

겁을 이기지 못한 탁사정은 야밤 중에 서경을 탈출해 혼자 도주하였고 거란군의 반격에 패퇴한 지채문 장군은 수도 개경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서경에서는 강민첨 등 항전파들이 결사항전에 나서 서경을 지켜냅니다. 개경으로 복귀한 지채문 장군은 고려 현종의 피난을 호위하기로 합니다. 이때부터 영상 앞에 말씀드린 현종의 고생길이 시작하는데요. 파주에 이르렀을 때 무장한 군주 견형이 파주 부근에 사람들과 함께 활을 겨누며 현종의 일행을 습격했습니다. 지치문이 말을 타고 활로 그들을 내쫓았다가 다시 그대로 뛰쳐나왔기 비를 막자 지치문이 다시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경기도 양주에선 양주의 어떤 향리가 사람들을 무장시켜서 한밤중에 왕의 처소를 습격했습니다. 이때 신하들과 환관 궁녀들이 모두 현종과 왕실 곁을 지키기 도망가 버리거나 숨어버립니다. 극소수의 신하들만이 현종 끝에 있었고, 지채문 장군은 남은 병서들로 현종을 지키고 있자 적도들이 감히 접근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4. 지채문 왕후들을 지키다

새벽이 됐을 때 지채문 장군은 두 왕후들을 먼저 북문으로 도망치게 해주고 일부 신하들과 함께 현종을 지키면서 현종도 피신시켰습니다. 지채문 장군은 진상 파악을 위해 적도들을 추격해 보게 현종은 지채문 장군도 도망가는 줄 알고 못 보낸다고 했죠. 이러자 지채문 장군은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필시 저를 죽일 것입니다. 하고 적도들을 저는 체포했습니다.

 

그런데 미리 피신시켜 두었던 두 왕후를 찾아 찾지 못하자 지채문 장군이 나가서 찾아왔죠 이후로 내려가는 내 내일부 신하들은 왕후들의 안전을 위해 고향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하자 지채문 장군은 왕후들과 떨어지는 게 더 위험할 수 있다며 반대했습니다. 왕후들을 고향으로 보내자고 한 신하들은 결국 다 도망칩니다. 탈영하는 병사들과 신하들이 너무 많자 지채문 장군은 현종에게 지금까지 남은 병사들에게 상을 내려 사기를 올리라고 제안해 현종은 병사들에게 관직을 하사해 주었죠.

전주를 지나칠 때 전주 호족이 현종의 행렬이 전주로 들어오는 것을 막자 별 수 없이 전주 부근 장봉역에서 노숙하다시피 했고 이때 또 조용겸 등이 난리를 피우자 지채문 장군이 군사들을 집계시켜 현종을 호위해 주었습니다. 지채문 장군이 지키고 있다는 소식에 난리를 피운 적도들도 지리말려 찢어졌죠 현종은 나주에 겨우 도착해서 나주에 행궁에 머무르고 있는데, 네 거란군이 나주까지 당도했다는 거짓된 정보가 퍼진 겁니다. 놀란 현종이 또 도망치 지채문 장군은 추상의 행체가 반중에 나가면 백성들이 놀라 동요할 터이니 행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제가 염탐하여 알아본 뒤에 움직이시더라도 늦지 않습니다라며 현종을 안심시켜주고는 알아보니 거짓된 정보였고 오히려 개경에 있던 거란군이 철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현종도 개경으로 복귀하였습니다. 복귀하는 길에 현종은 지채문 장군에게 짐이 피난을 떠나 먼 길에서 낭패를 보고 있을 때 호종하던 신루들은 모조리 뿔 오직 지체무만이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말 고삐 잡는 수고를 사용하지 않았고.

 

끝내 송죽처럼 절개를 지켰다 빼어난 고군을 생각할 때 어찌 특별히 응급을 내리지 않게 했는가라며 관직과 많은 상을 하사했습니다. 이후 계속 승진한 지채문 장군은 정 이푼 벼슬까지 봤습니다. 지채문 장군은 거란의 3차 침입까지 끝난 훨씬 이후에 사망하지만 3차 침입 당시 지채문 장군의 행적이 기록된 바는 없습니다. 다만 나중에 행종의 아들이었던 9대 왕 덕종은 고 상장군 좌복야 지채문 장군은 선왕께서 남쪽으로 파천하셨을 때 홀로 충절을 온전히 지켜 으뜸가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제 공훈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노라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훗날 고려의 8대 왕 현종은 지옥의 피날길 경험을 토대 삼아 지방 행정 구역 개혁을 완수해 고려의 중앙 집권화를 완성시켰습니다. 만약 지채문 장군이 없었다면 현종도 무슨 봉변을 당했을지 모르고 지채문 장군이 목숨 걸고 현종을 끝까지 지켜내 준 덕에 현종은 완성된 군주로 거듭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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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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