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포스팅에서는 고려 현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 개성까지 함락되었던 고려 멸망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추스르고 왜 이분이 아직도 영화로 다루어지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며 고려 최고의 성군으로 등극한 현종. 오늘은 고려의 세종이라 불리우는 8대 왕 현종을 집중 탐구합니다.
현종 왕수는 출생부터가 불행했습니다. 그는 적자도 서자도 아닌 부모의 사통으로 태어난 아이, 즉 사생아였기 때문이죠. 가계도가 매우 복잡하지만 쉽게 말해 아버지는 왕건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왕건의 손녀였습니다. 결국 어머니인 헌정왕후가 그녀의 숙부인 왕국과 결혼의 과정 없이 불륜 관계를 맺어 태어난 자식이 바로 현종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현종의 존재를 알게 되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생활을 걷어내고 혈통만 놓고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보다 더 고귀할 수 없는 활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 조정은 그가 사생아인 것을 알면서도 죽이거나 내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죠. 물론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는 고려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킨 괘씸죄로 왕욱은 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헌정왕후는 벌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헌종을 낳자마자 산고로 그만 죽어 버립니다. 현종도 참 불쌍한 것이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사생아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죠. 이 모습을 딱하게 여긴 당시 왕 성종은 슬하에 마침 자식이 없었기에 어린 현종을 거두어 유모를 붙여주고 가까이서 키웁니다. 그런데 당시 유모가 머리가 비상했는지 유아였던 현종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가르치게 되고 어느 날 성종의 무릎 위에 앉은 두 살 현종은 마침내 아버지 하며 매달리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성종은 어린 현종이 너무도 불쌍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어린 것이 얼마나 아버지가 그립겠느냐 네 아버지가 있는 사천으로 가서 살거라라며 현종을 사천으로 보내주고 왕후 현종 부자가 극적으로 성공을 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잘 살 것 같던 현종은 겨우 3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종은 또다시 그를 불쌍히 여기며 어린 현종을 맞이하지만 같은 해 성종마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이 없었던 6대 왕 성종의 뒤를 이어 5대 왕 경종과 천추태후 사이의 아들인 목종이 고려의 7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이 목종도 당시의 상식에서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이 우리 역사에 기록된 첫 번째 동성애자 임금이었고 유행간이라는 남자 등 예쁜 남자들을 매우 아껴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슬하에 자식도 없었죠. 아무튼 보호자인 성종이 승하한 후부터 어린 현종은 더욱 심한 고난을 겪게 되는데요.
그 이유인, 즉슨 어머니의 누이인 천추태5도 김치양이라는 각자 승려와 사통을 하여 또 다른 아이를 낳았고 자신의 아들인 목종보다도 김치양과 낳은 아이를 더 아꼈기 때문에 다음 왕위 계승을 김치양의 아이로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죠. 그래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다음 왕위를 이을 때 태조 왕건의 혈통인 현종이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당시 12세였던 현종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고는 지금의 서울 북한산 자락을 작은 남자인 신혈사로 보내버립니다. 게다가 곧 현종을 죽이기 위해 독이 된 음식을 수차례 보내다가 잘 되지 않자 아예 대놓고 자게까지 여러 번 보내는 집요함을 보여주죠 그런데 다행히도 신혈사에는 진관이라는 생명의 은인이 있어 어린 현종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진관은 천추태후가 보내온 음식을 까마귀와 참새에게 먹여 모두 죽는 것을 먹고 음식을 내다 버리는가 하면 자객이 왔을 때에는 미리 불상 아래에 파둔 굴에 현종을 숨기고는 아주 태연하게 나간 지 며칠 되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알아서 찾아보라라며 일상생활로 돌아가 자기 할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듯 진관 스님이라는 귀인 덕분에 위기를 넘긴 현종은 훗날 왕이 되어 진관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신열사의 이름을 진관사로 바꾸며 큰 절로 확장 재건축을 해주고 많은 재물을 시주합니다. 진관산은 지금도 삼각산 자락인 서울 은평구 진관동 진관길 73 에 위치하고 있으니 나중에 한번 산책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한편,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임금인 목적마저 허수아비로 만들며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는데요. 김치양에게 높은 벼슬을 몇 개나 겸임시켜 나랏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300 칸이 넘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대놓고 둘이 함께 지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드렸듯 김 취향의 자식으로 다음 왕위를 이으려고 했으니 아무리 허수아비 왕인 목종이어도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종은 강직한 신하라고 생각되던 서북면 도승검사 강조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개경으로 와서 자신을 구하고 김지환과 천수태후를 몰아내달라고 합니다. 명령을 잘 전달받은 강조는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격하는데요. 개경을 시키던 수비대도 아무런 저항 없이 강조군의 합류 김치양과 천수태후는 순식간에 처포당하기 그런데 강주에게 갑자기 피하식별장애가 찾아옵니다. 분명 목종의 명을 받고 개경으로 와서 국정 정상화되었습니다. 다시 북방으로 돌아갔어야 했던 강조가 김치양을 잡아 죽이고 천추태후를 기양 보내는 것까진 좋았는데 난데없이 자신의 주군인 목종까지 폐위시키더니, 목종의 남친강까지 죽여버립니다.
그것도 모자라 천추태후의 귀향길에 난데없이 목종을 원 플러스 원으로 묶어서 보내더니, 귀향을 가는 길목에 자객을 보내 목종을 죽여버리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죠 이것이 유명한 강조의 정변입니다. 그리고 강조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 신혈사에 있던 현종을 데려와 왕으로 세우는데요. 현종은 얼떨결에 왕으로 옹립되는 행운을 맞습니다. 물론 당장은 강조의 허수아비이긴 했겠지만, 자객으로부터 목숨이 위태롭던 상황에서 벗어나 일단은 왕이 되었습니다. 한편, 고려에서 벌어진 강조의 정변은 후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던 거란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거란 황제는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즉시 고려로 침공하게 되죠. 이에 고려의 실권자 강조는 전국에서 30만의 군대를 빡빡 긁어모아 지금의 평안북도에 있는 통주성으로 나가 거란군과 싸웁니다.
하지만 거짓 투태를 반복하는 거란군의 전형적인 전술에 말려들어 강조는 방심을 하게 되고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전투 중에 막스 안에서 장기를 두며 여유를 부리다가 순식간에 중앙을 돌파해 온 거란군 기병대에게 잡혀 많은 지휘부 장군들과 함께 그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야정군 대부분을 잃었고 거란군을 차단할 수 없게 되어 이후 거란군은 개경까지 하이패스로 밀고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개경에는 성벽이나 방어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전라도 방향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요. 이 피난 과정이 또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