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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투구 고니시 유키나가 등 관련 정보 알아보자

쌍둥할매 2024. 1. 1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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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오늘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원수지간이자 정유재란 당시 선봉장이 되어 조선을 침략한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많이 알려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대표하는 장수였죠. 하지만 훗날 그는 울산에서 진짜 말라 죽어버릴 뻔했는데요. 가토기요마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는 1562년 대장장이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야샤와카였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세 살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토는 어린 기요마사를 데리고 일족이던 카제아 고로스케의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는데 그때 자신의 운명을 바꿔줄 인물을 만나게 되죠. 인물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꽤나 똘똘하고 명석한 모습을 보이던 야샤와카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히데요시는 그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으려고 했죠.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이라 후다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가토 야샤와카를 자신의 후다이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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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샤와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고작 13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인 1575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했으며 그다음 해인 1576년에 그는 성인식을 마치고 영지를 하사 받았으며 기요마사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죠.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1583년에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워 다른 6명의 장수들과 함께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고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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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히데요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점점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영주가 되어갔으며 규슈 정벌 이후에는 17만 석이나 되는 영주가 되었죠. 가토기요마사는 편견창을 애용했으며 다른 장수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투구를 사용했는데 앞에서 보면, 끝이 뾰족한 삼각 불 모양의 투구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자신의 키가 작았기 때문에 키가 커 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런 투구를 썼다는 이야기도 있죠.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는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1592년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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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침해 침략한 일본군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군해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했는데 이때 일등으로 수도를 점령한 공을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빼앗기고 말았죠 그러자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누가 먼저 한양을 점령했는지에 대한 부부는 빼놓은 채 한양을 점령했다라는 내용만 쓴 보고서를 잽싸게 보내버렸는데 이를 알아 잰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의 압삽한 모습을 탄핵하자 그때부터 고니시 유키나가뿐만 아니라 이시다 미츠나리와도 사이가 굉장히 틀어져 원수지간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으로 진입할 때 숭례문을 통해 들어오게 되었는데요.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통감부에서 교통 편의상 숭례문을 헐어버리려고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기요마사가 입성했던 문이기 때문에 개선문이나 승전 기념물처럼 여겨져 일본인들이 극구 반대를 했던 덕에 철거되지 않고 다행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하죠. 이후 일제강점기 때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된 이유도 일본의 한양 점령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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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같은 이유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과한 흥인지문 역시 철거가 취소되었다고 하죠. 의도치 않게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우리나라의 문화재 보존에 기여한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문화재를 죄다 파괴하고 불태우기도 했는데 경주에 불국사를 불태운 것도 기요마사였으며 당시 기록을 봤을 때 경복궁을 불태운 것도 그의 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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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후 유키나가는 도망친 선조를 쫓아 평양 쪽으로 향했고 가토는 방향을 틀어 함경도 방향으로 북진했는데요. 거기서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기도 했으며 심지어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가 여진족에게 시비 걸었다가 개같이 털린 뒤 얼른 다시 조선으로 철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호랑이를 사냥하는 걸 즐겨했다는 것이 유명하게 알려진 이야기인데요. 심지어 그가 사용한 무기가 편견창인 이유가 양쪽으로 날이 있는 창을 쓰다가 호랑이를 사냥하는 호랑이가 물어서 한쪽이 부러졌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썰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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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록상에서는 그가 호랑이를 사냥했다고 증명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고 하죠.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호랑이를 사냥해 바친 장수들에게 자신이 서명한 주인장을 하사했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주인장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훗날 그에게 조선호랑이 사냥을 즐겨한 가토 기요마사라는 인식이 생긴 이유는 적국의 강한 맹수를 사냥해 일본인의 기계를 떨친 인물로 영웅화된 것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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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후 그는 북관대첩에서도 패배하고 명나라군이 지원군을 보내기까지 하자 결국 점점 밀려 남쪽으로 퇴각하게 되었고 서생포외성을 축성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때쯤 고닛이 유키나가는 강화를 위한 교섭을 활발히 하고 있었는데, 그때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온 조선의 사신 사명대사와 회담을 할 때 그가 사명대사에게 조선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사명대사가 기요마사를 가리키며 그대의 목이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죠. 이후 그는 1596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고 다시 일본에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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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교섭 내용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억지를 부린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키는데요. 이때는 기요마사가 선봉장이 되어 조선을 다시 침략했죠.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원수같이 여기던 그를 자신의 손으로 없앨 수는 없으니 그가 도해한다는 정보를 조선에 흘려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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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뜻밖의 수확이 있었으니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조선의 3도수군 통제사로 원균이 임명되었던 것이죠.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이 임진왜란 패배의 이유라 생각했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를 먼저 빼앗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재해권이 없다면 보급도 어려워지는 걸 깨닫고 수륙 양면으로 진격하는 걸로 작전을 세웠던 것이죠. 서생포에 머무르고 있던 가토기요마사는 병력을 이끌고 전라도 방향으로 진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본군은 7000량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을 완전 괴멸시키다시피 해버렸고 이후 편하게 전라도로 들어갈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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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구례와 남원이 점령되었고 가토기요마사도 황석산성을 함락시켰으며 전주를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도망가는 바람에 일본군은 전주에도 무열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손쉽게 일본군은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이자 평야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때 일본군에 의해 조선 백성들은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당했으며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붙잡혀 일본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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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군의 계획이었던 수륙 양공책이 완전히 좌절되기 시작했는데요. 원균이 죽고 나서 다시 3도수군 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대파해 버린 것이었죠. 그러자 일본군은 보급로가 차단될까 우려해 전면적으로 전라도에서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 역시 울산외성을 쌓고 농성을 하기 시작했죠. 조명연합군은 울산외성을 타겟으로 사마 그곳을 공격했지만, 기요마사 부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퇴각했고 이후 연합 군 총사령관이던 양호는 전략을 변경해 고사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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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에 있는 일본군을 말려 죽이기 위해 성 주변의 우물과 태화강의 물줄기도 막았죠 그러자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식량과 물이 떨어지기 시작해 갈증과 굶주리기 시작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식수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섰지만 조명연합군에 의해 철저히 개박살 나버렸고 호위망을 뚫어보려고 기병들을 내보내 보기도 했지만, 이들 역시 전멸해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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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하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농성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안가 식량과 식수가 다 떨어진 일본군은 결국 말을 잡아먹었고 식수 대신 말의 피를 마셨죠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소변까지 받아 마셨으며 총대장이던 가토기요마사 역시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마실 물이 없어서 천에 흡수돼 있던 수분을 짜내어 마셨습니다. 그렇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결국 할복을 준비하는 사태까지 맞이하게 되었는데 기요마사가 그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 장수들은 이러다간 연합군한테 다들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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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기요마사를 구원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나와 병사를 이끌고 울산외성으로 진군했습니다. 심지어 사이가 나빴던 고니시 유키나가까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고 그렇게 조명 연합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이후 결국 연합군이 패배해 기요마사는 구4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죠. 그리고 기요마산은 서생포까지 후퇴에 짱박혀 있다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서 전 일본군이 퇴각할 때 후다닥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울산의 성 전투가 기요마사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는지 이후 그는 평상시에도 항상 쌀과 된장을 넣은 군량 주머니와 돈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지었던 구마모토 성에는 실내에 까는 다다미도 유사시 식량으로 쓸 수 있도록 토란 줄기를 넣어 짰다고 하고 성벽에는 조롱박을 키웠으며 성 안에는 우물만 120개나 폈다고 합니다. 울산 왜성에서 있었던 경험이 너무나도 끔찍했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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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도착한 기요마사는 곧장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찾아갔지만 이미 죽은 후였고 이후 자신이 죽도록 싫어하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정권을 잡게 되었죠. 하지만 또 다른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전국의 패권을 가지려는 야망을 드러내자 결국 일본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큰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가토기요마사는 워낙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와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반대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서게 되죠. 이시다 미츠나리가 정권을 손에 쥐고 온갖 전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명분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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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특이한 점은 가토 기요마사가 순수하게 이시다와 고니시가 싫어서 동군 편에 붙은 것이지. 주군이던 도요토미 가문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는데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고 이시다와 고니시가 참수되자 이후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했죠. 심지어 구마모토 성의 별씨를 따로 만들어 여차하면 히데여리를 데리고 와 이곳에서 모시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이에야스와 히데여리가 만나 회담을 나눌 때는 품의 단도를 숨기고 히데어리를 보호해 주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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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과 원수지간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토를 다 소유하게 되었는데 결국 둘의 앙숙 관계는 가토 기요마사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1611년 6월 24 1주군이었던 히데요시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고 안심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하죠. 가토가문이 계속해서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것이 꼴 보기 싫었던 도쿠가와 가문에서 기요마사가 죽은 이후 가토 가문을 풍비박산 내버리고 말았는데요. 하지만 살아남은 자손들은 오랫동안 가문을 유지하며 살았고 지금까지도 가문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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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백성과 한반도를 무참히 짓밟았던 인물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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