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포스팅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장을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1558년 교토에서 약재 장사를 하던 고니시 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죠. 당시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나 셋째, 아들들은 아들을 못 낳은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렇게 유키나가는 한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유키나가는 자신이 있던 지역의 영주 우키타 나오이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무사로 발탁받았고 그의 가신이 되었죠.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나오이에를 공격해 오자 나오이에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는데요. 그때 교섭을 하기 위해 유키나가가 나갔고 그렇게 히데요시를 만나게 되었죠. 이때 그는 히데요시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시간이 흘러 나오이에가 세상을 떠나자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것입니다. 이후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정권에 수군을 통솔했는데 1584년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게 되었죠.
그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고 하는데, 1585년 유키나가는 영주가 되었고 자신이 하사받은 영지 쇼도섬의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세스페데스를 초빙의 가톨릭 포교 활동을 했으며 이후 그는 180도 달라져 거만했던 성격이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바뀌었고 오사카의 한센병 요양원과 고아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유키나가가 얼마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지 그의 영지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예수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한 것이 유키나가였다고 하죠.
하지만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때 그는 욱혼을 숨겨주고 추방령의 부당함을 히데요시에게 간언하기도 했다고 하죠. 이때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에 있던 가톨릭 환자들이 유키나가의 영지로 도망을 쳤는데 그들을 처단하려는 기요마사와 그들을 보호하려는 유키나가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서로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당시 사위가 대마도주였는데 조선에서 수입하는 물자에 의존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사위 소요시토시의 신변과 조선과의 무형 문제 그리고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침략을 반대하고 나섰죠 하지만 히데요시의 뜻을 꺾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고 그는 굳이 전쟁을 하겠다면 자신을 선봉해 세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는 라이벌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 듯이 가장 먼저 조선의 상륙해 부산진성과 다대포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탄금대 등에서 조선군을 공격했으며 가장 먼저 수도 한양을 점령했고 도망친 선조를 쫓아 평양성까지 함락시키게 되죠. 그렇게 그는 참전했던 일본 장수들 중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기고만장한 상태로 선조에게 이제 곧 우리 수군 심만이 서해로 붙어오는데 대왕께서는 어디로 가실랍니까라는 식의 오만한 서신을 보내기도 했죠.
하지만 각지에서 군세를 수습한 조선 육군과 의병들이 점차 승리를 거뒀으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재해권을 빼앗기자 병력 충원도 어려워지고 보급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해 점점 궁지로 몰리게 된 유키나가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평양성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가 명나라에서 원군이 도착해 평양성을 공격하자 이때 유키나가의 동생인 고니시 요시치로와 사촌인 고니시 안토니오가 전사하기도 했죠.
그리고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삼한의 명나라 지원군이 평양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유키나가는 결국 한양까지 퇴각하게 됩니다. 이때 유키나가는 분풀이로 여성을 제외한 한양에 있던 조선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여러 건물들과 백성들의 집까지 거의 다 불태워버렸다고 하죠. 이후 계속 남하안은 명나라군 벽제관에서 벽돌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에게 대패하면서 일본군은 완전히 몰락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자 유키나가는 강화 교섭을 하기 시작했는데 서로 간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죠.
명나라의 심유경은 일본의 완전 철군과 사과를 요구했는데 유키나가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일본에 이양하고 명나라의 황렬을 천황해 후금으로 삼을 것이며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는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이때 명나라의 외교관들이 일본의 요구 조건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면서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라는 허위 보고까지 하게 되죠.
중간에 일본과 명나라는 서로 여러 번의 조건을 제시하는 등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강화 교섭이 타결되었고 명나라의 책봉사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그렇게 1596년 9월 2일 히데요시는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자신의 요구 조건 중 하나였던 볼모로 조선의 왕자를 일본에 보내야 한다라는 요구가 실현되지 않아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었는데, 이때 명나라 책봉사가 일본군의 완전한 철군을 요구하자 굉장히 격노했다고 하죠. 그리고 얼마 안과 명나라와 조선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했다며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유재란이죠.
이때는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가 제일진을 맞게 되었는데 유키나가는 평소에 죽이고 싶어 했던 원수 기요마사를 조선에 손을 빌어 처리하고자 조선의 경상우 병사 김흥서에게 사람을 보내 가토군이 곳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김흥서의 보고를 받은 권율은 조정에 알리는 동시에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 기오마사에 대한 공격 명령을 전하기 위해 권율이 직접 이순신에게 달려갔지만 이순신은 공무로 인해 여수에 있었고, 결국 가토는 부산에 상륙하게 되었죠.
하지만 유키나가가 벌인 이 일로 인해 상상 이상의 수확을 거두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순신은 파직되어 버렸고 후임으로 원균이 3도수군 통제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후 원규는 7000량에서 이순신이 조정해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을 고생을 해서 만든 조선수군을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가버렸으며 자신도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죠. 이후 고니시 유키 나가는 군사들을 이끌고 순천과 남원성을 함락시켰으며 이때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1598년 9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일본군이 급히 철수를 시작했는데요. 고니시 유키 나가는 조명연합군에 포위되는 등 큰 위기에 처했지만,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겨우 확보할 수 있었죠. 하지만 다시 수군 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퇴각하는 일본 수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유키나가는 노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겨우겨우 목숨만 건진 채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일본의 상황은 굉장히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조용히 지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제패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던 것인데요. 이에야스는 여러 영주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임진왜란을 겪으며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가졌던 영주들이 이에야스를 지지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자 히데요시의 충복이던 이시다 미스나리는 군대를 일으켜 이에야스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유키나가도 도요토미 가문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 편에 서서 서군에 가담해 세키가하라 전투에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서군은 동군에 밀려 전멸하다시피 해버렸고 유키나가도 병력을 거의 다 잃은 채 도망치다가 자결을 금지하는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할복을 거부해 결국 4일 만에 도쿠가와의 부하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죠. 이후 그는 서군의 다른 장수들과 함께 조리돌림당한 뒤 교토 로크조의 강변에서 이시다 미스나리와 함께 참수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같은 가톨릭 신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자신의 고해성사를 요청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이라는 이유로 그는 거절했고 사제를 불러달라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죠.
처형된 이후 유키나가의 수급은 효수되었으며 이후 교회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가톨릭식으로 장례를 치렀지만 결국 머리와 몸이 함께 매장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고니시 가문이 멸문된 이후 유키나가의 영토는 앙숙이던 가토 기오마사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죠. 결국에는 원수이던 가토기오마사에게 치고 말았네요. 고닛이 유키나가는 전쟁을 싫어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을 반대한 이유도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한 것이지.
명분 없는 전쟁과 침략전쟁에 반대한 것은 아닌 것 같죠. 임진왜란의 선봉장이 되어 한반도와 조선 백성들을 잔인하게 유린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