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금필 골암진 전투
유금필은 홍유와 함께 역성혁명으로 고려가 건국된 후 청주 일대에서 발생한 궁예 지지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유금필은 이후 골암진에 파견되는데, 골암진은 현재의 강원도 안변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위의 지도에서 윤선의 세력이 위치한 곳. 윤선은 궁예가 철원 천도 후 미치광이처럼 사람들을 숙청하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무리와 함께 북쪽으로 달아나 골암진에 자리를 잡았으며, 주위의 흑수말갈족들을 포섭해 끌어들이며 세력을 구축해 주위를 노략질하다 고려 건국 후(918) 동년 8월 왕건에게 귀부하며 고려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던 땅이었습니다.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 이 지역을 거둬들이고 성을 쌓게끔 지시했는데(920), 923년 북번(말갈)은 이 골암진에 나타나 노략질을 하며 깽판을 치기 시작했고 왕건은 유금필에게 지시하여 북번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2024.01.23 - [분류 전체보기] - 포스뱅크 공모주 상장일 사전청약 수요예측 키오스크 등 정보 정리'
골암진에 파견된 유금필은 북번의 추장들을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던 중 그들이 술에 취하자 ' 좋은 말로 할 때 이제 그만 복종할 것' 을 강하게 요구했고 그의 기세에 눌린 북번의 추장들이 고개를 숙이자 그대로 북번의 촌락들에도 병사를 보내 너희 추장들이 항복했으니 복종할 것을 요구하여 큰 출혈 없이 북번을 복종시키고 포로로 잡혔던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출해 냈고, 왕건은 이에 최소한의 피해로 대단한 일을 해냈다며 유금필을 극찬하고 큰 상을 내렸습니다.
2024.01.28 - [분류 전체보기] - 지채문 장군 고려거란 전쟁 중랑장의 활약은
직후 유금필은 복속된 북번 중 일부를 가려뽑아 제번병이라는 부대를 만드는데, 유금필 개인의 정예 사병부대로 북방 기마민족 출신 기병대가 주축이었습니다. 이 부대는 유금필이 무쌍을 찍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됩니다.
2. 후백제 견훤과의 충돌
이 무렵 후백제는 그동안 본인들의 동진을 끝없이 막아서던 난공불락의 철옹성, 대야성을 무너뜨렸습니다(920) . 견훤은 금강과 양검을 각각 전방에 배치하면서 신라를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고, 신라는 후백제의 압박에 갈수록 밀려 경북/경남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어졌습니다. 그러자 고려 접경 지역에서는 고려에 귀부하는 자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견훤은 이를 불편하게 여겼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 역시 후백제 견제 목적을 가지고 군을 통솔, 양국은 조물성(경상북도 안동~상주 사이로 추정)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견훤은 본인이 직접 정예기병 3천을 이끌고, 전진배치되어있던 본인의 아들들의 군대를 불러들여 친정에 나섰습니다. 그와 동시에 왕건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충청도 일대에서 성동격서로 군을 동원하는데, 임존성에 있던 장수 형적으로 하여금 소요를 일으키도록 했습니다.
2024.01.19 - [분류 전체보기] - 고니시 유키나가 노량의 빌런과 그의 처형, 앙숙 카토 키요마사에 대해 알아보자
그러자 왕건 역시 본인이 직접 친정을 준비하는 동시에 충청도 일대에서 후백제의 군대가 준동하는 것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으니 믿고 신임하는 장수 한 명에게 군대를 주어 파병을 결심합니다. 왕건은 북방에 주둔해 있던 유금필에게 정서대장군이란 작위를 내리고 군을 이끌어 충청도로 가게끔 하는 동시에 본인도 상,중,하 3군으로 나누어 군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3. 유금필 임존성 전투
925년 10월, 유금필은 군대를 이끌고 연산진(청주 상당)을 털면서 이곳을 지키던 후백제 장군 길환을 전사시켰고, 이어 임존성(충남 예산)을 공격해 형적과 후백제군 수백을 죽이고 병사 2천여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주군인 왕건은 조물성에서 벌어진 후백제군과의 전투에서 견훤이 직접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탈곡 당하면서 3군 중 상군과 중군이 궤멸, 하군만이 남아 후백제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유금필은 본인 휘하 제번병과 급속 기동을 통해 충청도를 가로질러 조물성에 도달했고, 견훤은 유금필이 전장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놀라움을 표하는 동시에 왕건에게 화친을 제의하는데 때마침 전황이 불리했던 왕건도 이를 받아들여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왕건이 견훤을 상보라고 우대하는 조건으로 강화가 체결 되었습니다. 유금필은 화친에 강하게 반대했으나, 왕건은 '경이 연산진과 임존성을 이미 격파했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 며 유금필을 치하한 뒤 그의 만류를 뒤로 하고 그대로 화의를 진행했습니다.
견훤은 왕건과 화친을 맺은 직후 고려군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자, 그대로 여력을 몰아 신라 국경을 들이쳤고 거창, 고령, 성주, 구미 등 경상도 지역 여러 곳을 공격하여 점령, 후백제의 영역권을 넓혔습니다. 이미 화친한 이상 고려는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고려에 있던 후백제의 인질 진호가 뜻밖에도 급사하자 견훤은 분노하여 후백제로 왔던 인질 왕신을 죽여버렸고, 양국간 맺었던 짧은 화친이 끝나게 되자 왕건은 조물성에서 후백제에게 밀렸던 것을 상기하고 초반부터 강하게 공세로 나섰습니다.
2024.01.18 - [분류 전체보기] - 고려 현종 가계도 업적 아버지 등 출생의 비밀 고려 거란 전쟁의 주인공
927년 왕건은 후백제와의 국경 곳곳에서 공세를 펴기 시작했고 신라의 호응 하에 후백제를 압박했습니다. 용주(예천)를 점령한 뒤 운주(홍성)을 공격하는 한편 근품성(문경)을 연이어 손에 넣었고, 수군을 동원하여 진주를 타격하는 등 동시다발적으로 후백제를 공격했고, 결정적으로 김락이 신라에서 후백제로 넘어갔던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시키면서 문경에서 합천에 이르는 후백제 포위망을 구축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후백제 휘하 세력이 고려에 눈치를 보다 귀부하고 있었습니다.
4. 태조 왕건 공산 전투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견훤은 오히려 대담한 발상을 했는데, 고려가 점령했던 근품성을 다시 수복하여 문경 일대를 확보하고 고울부(영천)를 공격해 점령하면서 신라의 핵심 서라벌을 직접 위협하는 군사 행동을 벌였고, 그러자 신라에서는 다급하게 고려에 헬프를 요청했습니다.
2024.01.10 - [분류 전체보기] -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총정리
왕건은 고려군 10,000명을 급파했으나 고려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 견훤은 정예기병을 주축으로 문경에서 김천 사이의 좁은 틈을 이용해 상주-군위-영천-경주로 기습 기동을 진행, 때마침 후백제 포위망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전진배치되어있던 신라군 수비의 허점을 정확하게 꿰뚫어버렸고, 서라벌을 점령한 후백제군은 경애왕을 죽이고 견훤이 왕비를 범하는 등 신라에 대한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약탈 후 방화를 저지르며 서라벌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자 미리 급파했던 만명의 군대와 지휘관 공훤에게 경주를 섣불리 공격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대야성에 있던 김락에게 고려&신라의 군대를 이끌고 합류할 것을 명령하며 본인도 정예기병 5천기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합류, 서라벌에서 철군하는 후백제군과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2023.07.29 - [분류 전체보기] - 에코프로 주가 전망 당일단타 또는 눌릴 때만 매수하자
왕건과 고려군은 후백제가 그동안의 기병 위주의 무리한 기동으로 지쳤을 것으로 여겼으나 후백제의 주력은 견훤이 직접 이끄는 정예기병으로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서라벌에서 빠른 재정비 후 천천히 남하해오는 고려군의 동향 및 포진을 미리 파악하여 오히려 사방에서 공격해왔는데 신라 정규군 출신이 많던 후백제의 노련한 정예병력 및 장수들은 고려의 군사들보다 오히려 익숙한 지형 및 지세 파악을 바탕으로 신출귀몰 기동하며 매복, 기습을 통해 고려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동시에 예측한 지역에 고려군이 매복하자 이를 역매복으로 쌈싸먹으며 고려군을 손쉽게 관광 보냈고 기세에 눌린 고려군은 점차 몰리면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신숭겸, 김락 등 주력 장수들의 희생 끝에 왕건이 겨우 탈출에 성공하며 고려군은 대패합니다(공산 전투, 927)
5. 유금필, 태조 왕건을 구하다
전투 이후인 928년, 견훤은 관흔으로 하여금 다시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눈엣가시같았던 발밑의 가시 나주도 다시 손에 넣었습니다. 고려는 경상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렸고 신라는 사실상 후백제의 속국과 마찬가지인 상황으로 떨어졌습니다. 고려에겐 최악의 상황이었으나 후백제가 서라벌 점령 이후 벌였던 만행과 패악질에 옛 신라의 영향권 내에 있던 호족들 및 고려 내 호족들은 견훤에게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좌절에 빠져 있던 왕건에게 명주를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궁예 사후 본인과 적대하던 김순식이 귀부해 온 것은 천군만마를 얻는 듯한 소득이었습니다.
유금필은 북방에서 소환되어 928년 탕정(충남 아산)에서 축성을 감독하던 중 난공불락의 철옹성 삼년산성(충북 보은)을 공격중이던 왕건이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쫓기고 있다는 소식에 군사를 휘몰아 서원(청주)에서 후백제의 추격대를 격파했고 목숨을 부지한 왕건은 충주에 주둔하여 유금필의 보고를 받고는 '공산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을 잃어 국가를 위해 심히 근심했거늘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하게 되었다' 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그렇게 왕건은 928년까지 후백제의 공격에 탈탈 털리면서 수세에 몰렸고, 견훤은 고려에 귀부했던 경상도 일대 호족들을 제압하며 경상북도 일대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견훤의 눈에 들어온 곳이 경상북도에서 고려의 마지막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고창(안동). 견훤은 그대로 고창으로 진격을 개시했고 후백제군의 기세에 눌린 왕건은 이대로 고창을 포기할까 고민했고 홍유와 공훤이 미리 질 것을 대비하여 퇴각할 길을 닦아놓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고려군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몰려 있었습니다.
.
그런 왕건에게 닥공을 주장하며 선봉에 선 자가 있었으니 유금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