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융서 요 성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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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율융서라는 인물은 뒷날 등장하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홍타이지가 끊임없이 조선을 괴롭히듯 야율융서도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혔습니다. 아니 어쩌면 홍타이지보다 더했습니다. 남의 나라 수도를 함락시켜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홍타이지와 상황이 조금 다른 건 임자를 잘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번 영상의 주인공 거란 제6대 황제 성종, 야율융서입니다.
거란의 황제들 중 재위가 길고 훌륭한 이름을 남긴 황제는 오직 성종, 야율융서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종은 요나라에서 정치를 잘 한 왕입니다. 거란 성종, 야율융서가 즉위하기 전 거란은 생각보다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내부에서는 황위 계승을 두고 싸우기도 했고 또 연달아 폭군이 등장해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다. 살해됩니다. 그나마 거란 고대 황제인 경종이 즉위하는 나라가 조금 돌아가는 듯했는데 십여 년 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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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란 경종의 어린 아들이 즉위하게 됩니다. 결국엔 성종, 야율융서의 어머니 소태후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성종, 야율융서는 대부분 어머니에게서 국가의 통치를 배우게 됩니다. 아직 남아 있던 발해의 후신인 정황국을 무너뜨렸고 기세를 몰아서 봉경유수 소선녕이 고려까지 하지만 생각보다 고려가 완강히 잘 버텼고 고려의 서희가 항변을 잘했기 때문에 거란과 고려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선에서 끝이 납니다. 중원을 통일했던 송나라 하지만 아직까지 거란이 소유했던 연운 16주에 미련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양국은 계속 충돌했지만, 확실하게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1004년 9월 가을 소태후와 성종, 야율융서는 친히 20만 기병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송을 공격했습니다.
이때도 거란의 주특기인 우회하여 수도 급습하기 전략을 활용해서 황하 근처의 전형까지 진군해 왔습니다. 송나라 수도인 카이퐁이 코앞이었기 때문에 송나라에서도 평화 협정을 맺길 원하게 됩니다.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면서 목종이 사망하게 되고 현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에 거란에서는 소태후가 사망하면서 이제 거란의 성종, 야율융서가 직접 통치하게 됩니다. 성종, 야율융서는 여진을 통해서 고려의 강조가 왕을 없앴다는 사실을 알고 이걸 구실로 삼아서 무려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공격합니다. 처음에는 기세 좋게 고려의 최북단인 흥화진을 공격했지만, 고려 도순검사 양주의 우주 방어 때문에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반으로 쪼개서 20만 대군은 북쪽에 남겨두고 성종, 야율융서는 나머지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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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강조는 홍주에서 30만 대군으로 거란 성종, 야율융서와 맞서서 처음에는 검차로 이겼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에 강조의 군대는 대패하게 되었고 성종은 퐁주성은 점령하지 못했지만, 곽주성을 점령하면서 드디어 중간 기지를 마련했습니다. 서경 개경도 이제 위태로워졌습니다. 서경은 함락될 듯하다가 겨우 버텼지만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 가면서 성경은 손쉽게 개경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개경을 점령한 성종, 야율융서는 들어가서 가차 없이 고려인을 살육하고 개경을 파괴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성종, 야율융서는 더 이상 고려왕을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흥화진에 있던 양규가 갑자기 곽주성을 점령하면서 거란 본토와 연결할 중간 기지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 고려왕이 이미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니 더 이상 성종, 야율융서에게 유리한 게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고는 결국 개경에서 물러난 성종, 야율융서는 물러나는 과정에서 꽤나 고전했습니다. 포로를 구출하는 양규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압록강을 넘던 도중에 흥화진에 남아 있던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도 거란은 끊임없이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해 왔습니다. 1018년 12월 성종, 야율융서는 소배압을 지휘관으로 삼고 10만 명의 대군을 주워서 고려를 공격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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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때 개경에서는 고려 현종이 철저히 준비했고 또 북쪽 지역에서는 강감찬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소배압은 완전히 꼬여서 대패하게 됩니다. 몇천 명만 건지고 살아 돌아온 소배압을 보고 성종, 야율융서는 매우 분노하였습니다. 내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낯짝으로 짐을 보겠느냐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 이런 말은 했지만, 기어의 얼굴 가죽은 벗기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거란은 전성기였습니다. 거란 성종, 야율융서가 잘했던 것이 내정이었습니다. 황족이라고 해도 뇌물제나 살인제는 법을 공평하게 집행했다고 합니다. 또한 조세 제도도 확실히 만들었죠. 일에서 거란이 귀주대첩으로 타격을 입어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주대첩이 있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대연님의 흑요국이 갑자기 요동에 세워지고 자칫했으면 고려까지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지만, 한때 발해인이었던 하행미가 포주성을 꼭 움켜쥐고 있어서 흑려국과 고려가 합쳐지는 일은 없게 되고 결국엔 하행미는 서란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렇지만 성종, 야율융서 말기엔 국운 쇠락의 씨앗이 점차 뿌려지게 되었고 성종이 죽으면서 거란은 쇠퇴를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