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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 장군 흥화진 김숙흥 곽주성 등 고려거란 전쟁 영웅에 대해 총정리

쌍둥할매 2024. 1. 10.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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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설원 한 남자가 갑옷을 입고 온몸에는 수십 발의 화살이 꽂힌 채 누워 있습니다. 새하얀 설원 바닥을 빨갛게 물들이는 남자의 뜨거운 피 처참한 그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만이 피어 있습니다. 이 남자는 왜 이 설원에서 쓸쓸히 죽어가고 있는 걸까요?

 

 

안녕하세요. 고려의 가장 거대하고 날카로웠던 화살 양규 장군에 대한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010년 전 세계 최강자는 전투 민족으로 이뤄진 거란이었습니다. 한 명 한 명이 활 네 개 길고 짧은 창가 철퇴 그리고 도끼로 무장한 거란의 기병들은 움직이는 무기고였으며 오늘날의 전차 부대에 버금가는 화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고려거란 전쟁 양규 장군

 

916년 초원을 통일한 거란 후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며 세계사에 키탄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은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거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거란의 황금기를 열었던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 성종이, 즉위하며 거란의 맹렬함은 전 세계를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1004년 송나라를 침공한 거란은 전연의 맹약을 통해 숨 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기 전 거란의 황제 성종은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려를 제압하고자 합니다. 고려의 확실한 굴복을 위해 거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출전을 준비합니다. 거란의 황제 성종이 직접 출진하며 명장 소배학과 더불어 의병천군이나 명명된 40만이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2. 양규 흥화진 전투

 

1010년 11월 17일 국방의 서른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란의 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모습을 성벽 위에서 한 남자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흥화진의 도승검사 양규 거란과의 국경의 최전방에 위치한 흥화진에는 고작 양규와 3000명의 군사뿐입니다. 설원을 뒤덮이며 다가오는 40만의 대군 앞에 흥와지는 후 불면 꺼질 듯한 촛불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흥화진 앞의 벌판을 빼곡히 뒤덮은 거란의 군사와 날카로운 눈으로 흥화진을 살펴보는 성종은 흥화진을 공격하기 전 양귀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전력의 열세 당연히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던 성종 그에게 양규의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성종의 예상가는 정반대의 답변이 서신에 적혀 있었습니다.

 

성종은 똑똑히 보거라 우리의 뼈가 한 줌에 재가 되고 몸이 가루가 되어 으스러질 때까지 성을 사수하여 대고려의 영광을 지켜낼 것 양귀에 답신해 송종은 불같이 분노하게 되고 휘하제장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오늘 내로 흥화진을 내게 가져와라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40만의 대군이 흥화진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의 최전방 흥화진을 둘러싼 삼청결사대와 40만 대군의 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종이 직접 참여한 친정인 만큼 거란의 장수들은 목숨을 걸고 흥화진을 점령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양규 또한 흥화진의 도승 검사로서 그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았죠 당시의 최첨단 무기들이 흥화진이 성벽에 배치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성벽에 배치된 것은 파르노로 불리는 쇠뇌였습니다.

활주를 당기는데 소 8 마리의 힘이 필요해 팔우란 이름이 붙은 살상무기가 양규 장군의 신호와 함께 준비된 파루노에서 화살이 발사됩니다. 날아오는 활을 바라보며 거란의 병사들은 방패로 방어합니다. 하지만 파르노에서 발사된 화살은 방패를 그대로 뚫고 들어가 거란의 병사들을 직경합니다. 그렇게 무너진 거란의 선봉 하지만 40만 대군이 기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빛발처럼 쏟아지는 파른 우를 뚫고 거란의 병사들은 계속 진격합니다. 다시 한번 양규장군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파르노를 거두고 정로를 준비하라 정로는 고려 시대 석공의 일종으로 높은 정확도와 활에 비교해서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늘을 뒤덮은 고려의 화사야 수천의 병사들이 쓰러지지만 거란의 병사들도 정해 중에 정해 쓰러진 아군의 시체를 밟으며 계속 진격합니다.

 

그리고 활의 사거리 내측으로 파고들기 위해 거란의 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성벽으로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파죽지세로 달려가던 거란의 기병들 갑자기 말들이 고꾸라지기 시작합니다. 달리는 속도를 주차하지 못하고 엉키며 넘어지는 거란의 기병들 왜 그런 것일까요? 바로 전쟁 시작 전 거란의 기병을 막기 위해 성 앞에 설치한 마름새를 거란의 군마들이 밟은 거죠. 마름새는 독을 바른 쇠침으로 거란의 파산 공세를 막기 위한 양규장군의 숨겨진 한수였습니다. 발사된 활과 정로들 하지만 3000명의 손에서 발사되는 화살로는 40만 대군의 진격을 잠깐 묶어둘 뿐이었습니다.

결국 거란이 야심차게 준비한 공성 무기 1000도목녀는 화마에 휩싸여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힘과 힘이 맞붙는 공성정뿐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40만이 거란 병세 흥화진에 남은 3000결사대 134배의 전력 차이 흥화진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였습니다. 하루를 버티고 이틀을 버티고 밤낮없이 몰아치는 거란의 공격에 고려 군사와 양규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칼날처럼 여전히 날카로웠습니다. 그들이 버텨주는 이 시간이 통주에서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고려 본대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드디어 1주일이 지나 아침해가 밝았습니다. 흥화진의 성벽은 여전히 거란이 성종 앞에 굳게 서 있습니다. 결국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성종은 넘어지지 않는 흥화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양규 김숙흥

 

이런 흥화진의 함락 실패는 최전방 기지를 수호함으로써 고려군 전체의 사기를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후방 방어를 위해 성종은 병력을 절반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성종은 치욕을 무릅쓰고 40만이 대군 중 무려 20만의 병력을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무로대에 배치하게 됩니다. 이렇게 양규 장군과 3000명의 고려 군사들은 20만의 거란 병력의 발목을 붙잡게 됩니다. 고려를 수호하는 위대한 업적의 첫걸음이었죠. 흑아진을 피해 남아 성종과 20만의 병력은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30만 대군과 마주하게 됩니다. 고려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통주성 앞 벌판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약 50만의 대군이 맞붙은 전투 초반 검찰을 바탕으로 한 고려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승기에 취한 강조의 방심으로 거란군의 기습을 허용하게 됩니다. 결국 강조는 성종 앞에 생포되어 무릎 꿇려지게 됩니다.

 

거란의 정의병을 패배로 몰고 갈 뻔한 강조에게 성종은 항복을 권유합니다. 하지만 강조는 부러질지언정 굽혀지진 않는 고래 신하 성종을 크게 이웃으며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오랑캐 시내가 되겠느냐라고 일괄합니다. 결국 성종은 강조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강조를 처형하게 됩니다. 대규모 회전에서의 승리를 기세 삼아 성종은 통주성까지 점령하고자 하나 통주성의 격렬한 항쟁으로 결국 통주성 또한 함락시키지 못하고 남하기 시작합니다. 남하하던 와중에도 뒤편의 흥화진이 계속 신경 쓰였던 성종은 강조의 명령으로 위장하여 흥화진이 양규에게 서신을 보냅니다. 이미 고려군은 패배하였으니 양규는 거란에 항복하라 서신을 받아든 양규는 이런 성종의 계책을 정면에서 박살 내버립니다. 거란이 사신에게 나는 고려 임금의 명을 받고 흥화진을 지키는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바꾼 것이 아니라고 일갈합니다.

4. 양규 곽주성 탈환

 

결국 성종은 본인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흥화진을 내버려둔 채 남하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010년 12월 6일 성종은 고려 침공 이후 처음으로 곽주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고려 이 차 침공 때 성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든 병참 기지였습니다. 이 곽주성은 거란 40만 대군이 보급 창고 역할을 하게 된 거죠. 거점을 확보한 성종은 거침없이 고려 제 이의 수도 서경으로 진경합니다. 쉽게 함락할 것이라 생각했던 서경성에서 성종은 지체문 장군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서경성에 피 맺힌 항전으로 성종은 서경성에서도 힘든 전투를 이어나갑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지체문 장군도 대단하신 분인데 우리의 역사에는 잊혀진 영웅입니다. 고려의 최고의 호위 장군이었던 이분에 대한 이야기도 제 채널의 영상으로 업로드해 두었으면 꼭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종이 서경성 공략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풍화진에서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선택이 일어납니다. 거란과 고려 이 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 승리를 위한 암전이 발사를 기다리고 있었죠. 곽주성의 병참기자 소식을 들은 양규 장군은 흥하진이 남은 병력 중 700명을 선발하여 기병으로 구성된 결사대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양규와 700명의 기마병은 은밀히 봉화진을 나섭니다. 그렇게 거란 성종의 목을 꿰 뚫을 검은 화살 암전이 발사되었습니다. 20만인 거란 군사가 무르대를 중심으로 고려의 북방을 전부 포위하고 있는 상황 이미 고려의 북방 지리를 꿰뚤고 있는 양규와 결사대는 산길과 오속길을 통해 20만 대군을 우회하여 통주에 도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통주 대패전의 패배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통주벌판 솟아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힌 양 규장군은 통주 전투에서 패배한 패전병을 수습하여 1000명의 병사를 보충합니다. 그렇게 700의 결사대는 1700의 숫자로 늘었지만 여전히 거란에 비하면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병 안녕하세요. 하지만 그들의 의기와 충정은 병력의 열쇠 따위는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만큼 날카롭습니다. 1010년 12월 16일 세계 전쟁사 유례 없는 불가능한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미 거란의 병참 기지로 전락한 곽주성 안에는 6000명의 정에 거란물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성전은 수성하는 병사의 5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양귀와 결사대는 성을 지키는 거란군에 비해 3분의 1도 안 되는 전력이었죠. 칠흙같이 어두운 야심한 밤 거란군이 지키고 있는 곽주성의 성벽을 일 단위 결사대가 은밀히 기어 올라갑니다.

 

발각되는 순간 그들의 목숨은 이슬처럼 사라지겠지만, 성벽으로 올라가는 결사대의 눈에는 두려움 따위는 없었습니다. 곽주성이 은밀히 잠입한 병사들은 성문을 여는데 성공합니다. 열려진 성문으로 거센 파도와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양귀와 1700의 결사대 20만의 대군이 고려의 국방을 포위하고 있었기에 곽주성의 거란군에게 양규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과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실제로 역사상인 이날 곽주성에서 두 차례나 유성이 관측되었다고 하죠. 당황하는 6000의 거란 군사 뒤늦게 항전을 해보지만 양주와 결사대의 날카로움은 거란군의 숨통을 끊어놓습니다. 다음날 아침 곽주성 안에 살아있는 거란 군사는 없었습니다. 단 1700여 명 그들은 고려를 지키겠다는 의기와 기계로 지금까지도 역사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습니다.

그렇게 거란의 병참 기지를 탈하낸 양규는 곽주성 내에 7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으로 이동합니다.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동한 것이었죠. 이 소식은 곧바로 거란이 성종에게 도착해 성종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겁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20만의 군사를 북쪽에 배치하고 남한 것인데 두터운 포위망을 뚫고 온 양규와 그의 결사대가 40만 대군이 보급을 끊어버린 것이었죠. 결국 보급의 문제와 후방의 불안으로 성종은 서경 공약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바로 진격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고려 조정조차도 고려의 패목만을 생각하던 거란의 이 차 침공 그 어두웠던 전쟁 속에서 양규장군이 쏘아낸 암전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전쟁의 양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무조건적인 개경 진격을 통해 성종과 거란의 대군은 1011년 1월 1개경 진입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성종의 예산과는 달리 이미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한 상태였죠 이때 등장한 하공진의 담판으로 성종은 현종이 직접 거란으로 가서 인사하겠다는 말뿐인 약속만 받은 채 개경 진입 11만인 1월 11일 거란으로의 퇴각을 결정합니다. 퇴각하는 거란이 군사 속에는 성종이 포로로 잡은 수만 명의 고려 백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구는 중요하지만 당시에는 인구수가 곧 노동력과 국방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고려 포로들은 거란의 최고 전리품이었죠. 물론 고려 입장에서는 다시 없을 뼈아픈 손실이었죠. 하지만 퇴각하는 성종과 거란의 대군들은 이때부터 진정한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 양교의 곽주성 탈환으로 후방의 모든 거점을 포기한 채 남하한 거란이 퇴광 후에는 서북면과 동북면의 군사들이 그들의 목을 뜯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죠. 11년 1월 17일 거란의 군사는 총공령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갑작스레 내린 비로 불어있는 중공령 어수선한 틈을 타 귀주 별장 김숙훈과 중랑장 보량이 기습하여 거란군 일만 명을 사살합니다. 거란군이 재정비하여 반격하기도 전 귀신같이 사라진 고려의 군사들 1011년 1월 18일 양규장군과 1700명의 결사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무로대에서 여전히 성종을 기다리고 있는 20만 대군을 습경합니다. 거란 군사 2000명을 사살하고 고려 백성 3000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합니다. 1011년 1월 19일 양규장군은 이수에서 거란군을 습격하고 그에 놀라 도망치는 적군을 성령까지 추격하여 사살합니다. 거란군 2500명을 사살하고 고려 백성 1000명을 구출합니다. 1011년 1월 22일 열의참에서 후퇴하는 거란군을 다시 한번 양규장군이 덮칩니다. 이날 하루에만 총 세 번의 전투가 일어나고 양규 장군은 보두 승리합니다. 거란군 1000명을 사살하고 고려 백성 1000명을 호출합니다.

 

5. 양규 김숙흥 죽음

 

그리고 양규 장군은 기주 별장 김숙흥 장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거란 군사들을 습격하기 시작합니다. 거란군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몇 명의 적들인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그들이 죽음의 사신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예전에서 퇴각 중인 거란군을 습격하고 1000명을 서살한 후 고려 백성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때 멀리서 수많은 거란의 군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애전 그곳이 바로 성종 본대의 퇴각로였던 거죠. 아직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 백성들이 안전지대까지 피하지 못한 상황 누군가는 거란군 본대의 발목을 잡아야 합니다. 이제 거란의 본대도 양규 장군과 결사들을 발견하고 북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양규 장군과 김숙훈 장군은 서로를 마주봅니다.

그들의 두 눈에는 두려움이라곤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서로를 보며 웃을 뿐이었죠. 양규장군이 말합니다. 잘 됐군요. 여기서 성종의 목을 탑시다 그리고 김숙훈 장군이 답합니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성종이 찾아와 주니 고맙기 그시옵구려 양규 장군과 김숙훈 장군 그리고 1700명이 결사되는 밀려오는 성종과 거란이 대군 앞에 마주서게 됩니다. 한치 망설임 없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진격합니다. 점점 떨어져 가는 화살 한 명을 죽이면 10명이 달려드는 중과 부적의 상황 거란의 목을 노린 암전이 하나씩 꺾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항복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눈앞의 거란군의 목을 벨 뿐이었죠.

 

그리고 하늘을 뒤덮는 거란군의 화살 세례 양규 장군과 김숙훈 장군의 몸에 수많은 화살이 박히고 결국 그들은 고려의 절원에 몸을 누이게 됩니다. 멀리 고려의 백성들이 대피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양규장군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만이 피어올랐을 겁니다. 성종은 똑똑히 보거라 우리의 뼈가 한 줌에 재가 되고 몸이 가루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성을 사수하여 대고려의 영광을 지켜낼 것이다. 성종에게 보냈던 편지대로 양규는 마지막까지 고려 최고의 무신으로 눈을 감게 됩니다. 극한의 불리함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양규장군 한 달 동안 7번의 전투를 치렀으며 한 개의 성을 탈환하고 1만 명의 거란군을 사살했으며 3만 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했습니다.

이 전투 이후 거란은 압록강을 건너기까지 끊임없이 고려 군사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거란의 이 차 침공에 대해서 송나라의 역사서 속 자치 통감 잠편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란이 크게 패했다. 장졸들과 병절들 태반이 점몰했다. 수레로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거란은 패배로 기록한 것이죠. 거란의 사서인 묘사에서도 모두 지쳐서 갑옷과 무기를 대부분 버리고 날이 개자 겨우 강을 건넸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거란의 이 차 침공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이 불에 타고 왕은 몽진을 떠나는 치욕을 겪었지만 이 전쟁의 실상은 거란 또한 무수히 많은 병력과 물자 및 행정 관료의 손실이 발생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때 이후 거란은 관리들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면 모두 등용해야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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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차 침공 때 이런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없었다면 이후 강동 6주를 지킬 기반이 사라졌을 것이며 추후 3차 침공 때의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도 없었을 겁니다. 강감찬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채널에 올려두었으니 함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종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규장군 고려의 백성을 구해냄으로써 거란의 3차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국력을 보존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기억을 거란에 심어주게 되었죠. 1019년 양규장군 사후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으며 1024년에는 삼한 후 벽상공신 칭호를 내림으로써 고려의 건국공신이 삼한 벽상공신과 봉급으로 대우하게 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세상의 높은 벽에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매일매일이 막막하고 답답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반도의 역사를 보다 보면 세상의 높은 벽이 그렇게 무겁게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양규 장군의 이야기가 우리 앞에 놓인 벽을 뛰어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오늘의 이야기 마치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에도 멀리서 더 멀리서 또 다른 역사 이야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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