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은 장태완 인생의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진정한 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장태완은 193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대구상고에 진학하게 된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일어나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0일 임관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육군종합학교 출신들은 위험천만한 최전방에 있어야 했지만 장태완은 잘 살아남아 진급을 거듭하여 1971년 준장으로 진급하게 됩니다.
이후 장태완은 수도경비 사령부 참모장과 26사단장을 거쳐 1976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1979년 11월 비육사 출신 최초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발령받게 됩니다. 군인 장태완은 부하가 군인의 본분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랐던 이유로 체력이나 훈련 등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군인이었고 원칙에도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하의 식단이나 보급품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상냥한 면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서울의 봄 이태신의 실제 인물 장태완은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는데, 이때 갑종장교 출신의 자신에게 항명하던 육군사관학교 출신 김상구를 영창으로 보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습니다. 1976년 6월 장태아는 예고 없이 반공 진지 공사장에서 순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잠시 공사장을 걸어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었고, 뒤늦게 이를 알아채고 막사 앞에 와서 대대장이었던 김상구 중령이 나와 경례를 합니다.
참고로 김상구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하나의 핵심이자 한화의 보수였던 전두환과는 동서지간이었습니다 김상구를 앞세워 공사장에 간 장태완은 태만한 공사장을 보고 더욱 분노가 치민다. 이렇게 부족한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을까,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머리를 뻣뻣하게 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4년제 6살에 배울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말을 취소해 주시겠습니까?""
장태완은 자신에게 이렇게 맞서는 것이 하나회라는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가 화가 났습니다.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군가를 믿고 건방지게 굴지만 김상구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한 영관이 장군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어요. 그렇게 사랑부로 돌아온 장티환은 이를 참지 못했고 결국 김상구는 영창에 들어가 제대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상구는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고, 김상구의 손위 동서인 전두환 또한 그에게 악감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장태완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보직 이동된 시기는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에게 총구를 겨눈 십이륙 사건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권력의 중심은 권한대행 최규하 계엄사령관 정승화였습니다. 장태완이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지 한 달여 만에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신건부는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의 공백을 틈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승화의 공간에 허삼수 등을 보내 정승화의 연행을 지시했습니다. 같은 시각 전두환이 주선한 자리에 있던 장태완은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부대로 이동한 후 전두환과 신군부의 대(對)지향해 보았지만 이미 군권은 전두환과 신군부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기에 장태완의 대응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결국 신군부 세력이 12·12에 성공하자 장태완은 끌려갔고, 45일 동안 보안사령부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뒤 1980년 30년간의 군 생활에서 불명예스럽게 제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장태완과 그의 가족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향 칠곡에서 뉴스를 통해 1210이 소식을 들은 장태완의 아버지는 아들이 패장으로 묘사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아버지는 예로부터 나라의 모반이 있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고, 이때부터 술 이외에는 음식을 이듬해 4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태완은 아버지를 보내며 역도의 죄약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한 뒤 아버지 곁으로 갑니다. 그러나 장태완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장태완 부부에게는 슬하에 1남 1녀가 있었는데, 그중 아들은 아버지가 힘든 시절을 보내는 시기에도 장태완의 집 앞을 특수수사대 요원하게 지키는 가택연금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하고 입학하던 해 자연대 수석을 차지할 정도의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장태완이 힘든 시기를 보낼 무렵 아버지가 군인으로서 자신의 책임 완수를 위해 충정을 다했던 것을 역사는 결코 무시하지 않겠다며 아버지를 위로하는 믿음직한 아들이었습니다. 1982년 1월 9일 아침 거실에 있던 장태완에게 "아빠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아들은 머리를 식히고자 여행을 떠났는데, 그것이 장태완과 아들의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서울의 봄 이태신 실제 인물 장태완의 아들은 그렇게 집을 나간 뒤 소식이 없어 다급한 마음에 권정달과 박준병 등에게 문의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실종된 지 한 달 만에 경북 칠곡 낙동강 인근 산기슭에서 차가운 모습으로 발견돼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태완은 아들까지 잃고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여 영생하게 해달라는 말을 눈물을 머금고 비문에 새겼습니다 어이없는 세월이었지만 시간은 흘러 장태완은 한국증권주식회사 사장인 재양군인회 회장인 제16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2010년 숙환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장태완의 빈소에는 소식을 접한 장세동과 이종구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노태우는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지만 전두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태완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에게 최후의 비극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장인과 아들, 그리고 남편까지 먼저 보낸 장태완의 아내 이씨는 딸이 있었지만 결혼 후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씨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남편 장태완이 먼저 떠나자 이 여사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왔고, 혼자 살면 어떻게 하냐는 말을 당시 가정부에게 하면서 서운함을 토로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년 뒤 그의 부인이 유서를 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